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 드골 (문단 편집) === 부정적인 평가 === 프랑스 내에서 드골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그를 독재자로 평한다. 그에게는 권위적인 자세가 있어 미 대통령인 루즈벨트가 매우 경계했다. 그는 수세에 몰릴 때마다 재신임 투표[* 자신이 내걸었던 법안이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부결되면 사임하겠다]]는 조건을 건 투표.]를 통해서 [[신대통령제|실질적인 독재]]를 펼쳤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주장하는 법안과 자신의 재신임을 결합시키면서 정책에 대한 비판을 피해간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신임투표에 대한 반성으로 법학계에서는 대부분의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의 재신임을 결부시키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가령 대한민국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유신헌법의 찬반투표를 재신임투표로 하면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어내 장기집권에 성공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하나가 재신임 투표 제안 발언(청구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플레비사이트를 인정하지 않는다)이 역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비판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태도로 보인 것이 큰 이유였다. 헌법에 규정된 국민투표에 레퍼랜덤의 성격만 있느냐 플레비사이트의 성격만 있느냐에 대한 법리적 논쟁은 현재까지 지속 중이기는 하나 헌재에서 인정한 것은 레퍼랜덤뿐이다.] 대중이나 반목하는 정치 세력에게 결과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얻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 자체가 민주 국가의 현대 정치인에 대한 필수 덕목인데 드골의 리더십은 이를 무시했다. 프랑스 역사에 없었던 것도 아닌데, [[나폴레옹 3세]]가 독재정치를 펴고 황제가 된 기반이 바로 재신임 투표, 국민투표에 의한 [[포퓰리즘]]이었기 때문. 또한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나라에서는 신식민주의 체제인 [[프랑사프리크]](Françafrique) 정책을 이 사람이 시작하여 정치, 경제, 외교를 옛 식민지 국가를 독립 후에도 예속시켰다는 비난을 받는다. 예를 들어 [[1963년]] [[8월 15일]]에 일어난 [[콩고 공화국]]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때 초대 대통령 [[퓔베르 율루]]의 지원 요청을 거부함으로서 그를 실각하게 만들거나, [[가봉]]의 초대 대통령 레온 음바가 [[1964년]] [[쿠데타]]시도가 일어날 때 군을 파견하여 구데타를 진압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기니]]가 [[1958년]]에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들과 달리 전면적인 독립을 추진하자 [[프랑스]]가 [[기니]]에 깔아놓은 모든 인프라들을 파괴하고 떠나서 [[기니]]의 경제를 철저히 파탄나게 만들었고, [[토고]]의 초대 대통령인 실바누스 올림피오가 반불정책을 펼치자 [[1963년]] [[1월 13일]]에 [[냐싱베 에야데마]]주도의 [[쿠데타]]를 지원하였다는 의혹도 있다. 이외에도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세네갈]]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장 베델 보카사]], [[토고]]의 [[냐싱베 에야데마]], [[가봉]]의 [[오마르 봉고]]와 같은 친불 성향의 구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그들을 강력히 후원하였으며 [[니제르]], [[말리]], [[부르키나파소]],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차드]], [[카메룬]], [[콩고 공화국]], [[베냉]], [[토고]] 같은 구 식민지 [[아프리카]]국가들에게 정치, 경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넘어서 국정 전반에 큰 영향력을 끼쳐서 신식민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다만 이러한 정책기조가 없었다가 드골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들은 [[기니]][* 이 나라도 드골이 대통령 취임하기 몇 개월 전에 독립했다. ]를 제외하면 드골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독립을 했기 때문에 프랑스가 독립을 시켜주면서 계속 세력권 안에 놓았다고 볼 수 있다.이후에도 정권이 바뀌어도 이러한 정책 기조가 현재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식민지들의 독립 이후 이러한 외교기조가 시작된 것은 드골 정권이 맞기 때문에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2020년대]] 들어 [[아프리카]]의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가봉]] 등의 국가들에서 오랜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반불 성향의 군사독재 정권들이 들어서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130년넘게 식민 지배를 당한 [[알제리]]에선 히틀러에 맞먹을 정도로 미움을 받는다. 드골이 4공화국을 무너뜨리고 현실을 직시해 알제리를 독립시키기는 했다. 드골은 [[에비앙 협정]]을 끌어내고 FLN과 프랑스 정부의 정치적 협약을 물리적으로 분쇄하려한 OAS의 쿠데타를 막아 알제리 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드골도 2차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측에게 '알제리는 우리 프랑스의 영원한 영토이자 안방과 같은 곳'이라고 말했고, 현역 정치인일 때 말뿐이나마 대프랑스 식민주의적 관점을 유지하며 진짜 막판에 가서 군 내 극우파를 숙청하기 전까진 오히려 이들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그 역시 진정으로 알제리의 독립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예전 알제리 여행을 하던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김화영 교수가 알제리인에게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 사람이 김 교수에게 드골 이름을 듣더니 "그 새낀 우리나라 알제리에선 히틀러요!"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김 교수가 높이 평가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과거 이야기를 하며 언급한 수준임에도 이랬던 반응을 보였던 걸 봐도 알제리에서 평가는 아주 극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2차대전 당시 드골은 '알제리는 프랑스 땅으로 다른 아프리카와 다르다'고 처칠에게 거듭 강조했던 인물이며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수백만 알제리인의 사망을 초래했으므로 알제리에선 히틀러급으로 증오를 받기도 했다. [[레지스탕스]]의 [[영웅]] [[장 물랭]]을 죽인 전직 나치 친위대원인 [[클라우스 바르비]]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 자크 베르제는 클라우스 바르비의 범행에 대해 "프랑스가 알제리한테 한 것처럼 한 것 뿐이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잘못을 한 것뿐인데 왜 프랑스인들처럼 당당하지 못하냐는 뜻이다.[* 자크 베르제는 크메르 루주 정권의 키우 삼판, 국제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자칼' 같은 유명인사들을 대변했던 변호사이다.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감독 마르셀 오퓔스는 '''마치 바르비가 알제리의 민간인들과 똑같은 수동적인 피해자였나보군''' 이라하며 서구 열강이 유럽 외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의 기만성에 대한 비판이 엉뚱하게 '''그냥 대놓고 대량학살'''을 주장했던 파시스트 정권에 대한 옹호로 변질되는 것에 일갈한 바가 있다.] 1960년 [[콩고 내전#s-2]] 때 촘베 장군의 쿠데타로 유엔군이 파견될 당시, 드골은 콩고 카탕가 반군 지역의 우라늄 광산 등을 노리고 용병 부대를 파견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프랑스]]가 아니라 [[벨기에]]의 식민지였으나 [[벨기에령 콩고]]당시 프랑스어의 영향력이 강력해서 프랑스어권 국가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식민지가 아니였지만 프랑스와의 외교관계가 밀접한 편이다. ] 용병들은 대규모 부대를 조직해 반군 지역으로 쳐들어갔으며, 촘베 장군의 사주를 받고 각종 사보타쥬 및 광산 점령에 나섰다. 많은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던 유엔군의 위상을 떨어뜨려 국제 질서를 문란케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